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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아리랑고개 (돈암동)

아리랑고개



나운규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아리랑고개라 하였다. 예전에는 정릉(貞陵)으로 가는 길의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로 불리어졌으나, 1926년 이후로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다. 그 연유는 일제 때의 영화인 나운규(羅雲奎: 1902∼1937)가 이 곳에서 영화 ‘아리랑’ 을 촬영하였기 때문이다.
1926년 9월 발표된 영화 ‘아리랑’은 한국 영화예술에 새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평가된다. 나운규는 이 작품에서 원작·각색·주연·감독을 혼자 맡았으며, 일제에 항거하는 주인공 영진역을 통해 민족의식을 잘 나타냈다고 평가된다. 수많은 작품을 통해 그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테마는 일제 식민통치의 억압과 수탈에 대한 저항과 통치권에 결탁한 자본가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후 1935년경 정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배경으로 고급요정 청수관이 들어서면서 「아리랑고개」라는 푯말을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고객을 끌어들였다.
아리랑고개를 넘으면 정릉이 나오고, 정릉에서 정릉천을 따라 북쪽 골짜기로 들어가노라면 유원지로 이름난 정릉골짜기가 나온다.
아리랑고개를 지나는 도로인 ‘아리랑고개’는 돈암사거리를 기점으로 하고 동소문동
과 돈암동을 지나 아리랑시장 앞까지에 이르는 폭 15m, 길이 1,450m의 도로이다. 지선도로인 ‘아리랑고개’는 서울시내 전체 가로명 가운데 대로나 로·길이 아닌 고개로 불리어지는 유일한 도로이다. 그만큼 아리랑고개는 유서 깊고 우리에게 친근한 고개로 남아 있다.
한편 성북구는 1997년 9월 이 아리랑고개를 영화전문거리인 ‘영화의 거리’로 조성하기로 계획을 수립하였다. ‘영화의 거리’는 나운규가 이 고개에서 영화 ‘아리랑’을 촬영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성북구의 계획에 의하면 현재 왕복 2차로인 아리랑고개를 2000년 12월까지 왕복 4차로로 확장하고, 보도와 신호등·가로등을 특색있게 조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의 거리’ 좌우에 테마공원을 조성하여 영화인광장을 만들고, 시민들이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는 객석 200~300석 규모의 야외공연장을 설치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정릉동 113번지 일대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영화기념관을 건립한다. 영화기념관 1층에는 영화전시실이 설치되고, 2층에는 영화관이 마련되어 우리나라 영화 역사에 전환점이 되는 옛 영화와 민족영화 등을 상영하고, 3층에는 문화예술인들의 대화·공개강좌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면서 도로 왼편에 정덕초등학교가 있는데, 이 학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올라가면 그윽한 산골짜기 돈암동 602번지에 흥천사(興天寺)가 나타난다. 80간의 이 절은 흔히 새절, 한자로 신흥사(新興寺)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원래 흥천사는 중구 태평로 1가 60­1번지 서울시의회 의사당 자리에 있었는데, 정조 18년(1794) 9월 이곳으로 옮겨 세워졌다. 이 절은 태조 이성계가 총애하던 신덕왕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너무나 상심하여 10일간이나 조시(朝市)를 정지하게 하는 등 애도하며 그 묘소를 경복궁에서 바라다 보이는 현재 중구 정동 4번지 영국대사관 자리에 정하고 정릉(貞陵)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태조 6년(1397) 7월에는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간의 흥천사를 건립하였다. 이 후 흥천사는 조계종의 본산으로서 승려 120여명이 늘 거처하였고, 세종 6년(1424) 불교를 선종·교종의 양종으로 통합할 때 흥천사는 선종 종무원(宗務院)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릉은 성북구 정릉동으로 이장되었다. 그것은 태종이 방번과 방석 두 이복형제를 낳은 계모 신덕왕후를 미워했기 때문에 도성 내에는 능을 둘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태종 9년(1409) 5월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능을 이장하고 그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짓고 신흥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정릉이 이장되어 절만 남게 된 흥천사는 세조 7년(1461)에 큰 종을 만들어 걸었으나 연산군 때에 이 절의 불당을 헐어 양주 회암사로 옮기고 절을 폐지하여 분사복시(分司僕寺)라 하였다. 중종반정 후 흥천사는 관청건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중종 5년(1510)에는 중학(中學)의 유생들이 불을 질렀다.
새로 지은 신흥사는 현종 10년(1669) 정릉에서 너무 가깝다 하여 정릉동 함취정(含翠亭) 옛터에 옮겨 지었는데, 정조 18년(1794)에 현 위치로 옮겨 지었다. 이 절의 칠성각은 헌종 12년(1846)에 재건되었고, 적조암은 헌종 15년(1849) 창건되었다. 그 후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은 절을 중건하고, 절의 내력을 잘 아는 까닭에 신흥사라는 이름을 고쳐 흥천사(興天寺)라는 휘호를 써 주었다.
흥천사에는 신덕왕후의 소생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태조 7년(1398) 이방원이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왕자의 난을 일으켰을 때 이방원이 이제(李濟)를 죽여 경순공주가 미망인이 되자 태조는 경순공주를 삭발해 흥천사의 중을 만들었다 한다.
요즈음의 신흥사는 사찰 이름으로 잘 알려진 것 보다는 그 아래 연회장이 밀집해 있어 약혼잔치, 회갑잔치, 칠순잔치 등 각종 연회장소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이 곳 연회장에 참석하러 오는 시민들로 이 부근은 교통체증이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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